시편 133편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절)
시편 133편은 교회의 복됨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교회 예찬시입니다. 시편 133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1절은 “보라,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감탄으로 시작됩니다. “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좋다”(good, 토브)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을 때의 바로 그 단어입니다. 또한 “아름답다”로 번역된 말은 “아름다운(beautiful), 즐거운(pleasant)”을 의미하는 형용사(나임)입니다(시 16:11 참조).
무엇이 그렇게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입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연합”이란 “하나됨”을 의미하며, “동거함”이란 “거주한다(dwell)”(룻 1:4), 또는 “앉는다(sit)”(룻 4:1)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야샤브(yashab)”의 번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 나라를 이루어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에 참으로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이 시편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전체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기록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렸지만, 사실 처음 7년 6개월은 유다 지파만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한 지파는 여전히 사울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고, 사울이 죽은 뒤에는 그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은 7년 반 동안 갈등과 전쟁을 치렀습니다(삼하 3:1). 하지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윗에게 찾아와서,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인정하면서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삼하 5장). 분열되어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절기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스라엘의 형제들이 화해하고 사랑으로 연합해서 절기를 지킬 수 있었고, 다윗은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감격하며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절).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연합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고 성도들과의 연합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성도들과 연합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룬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형제들”입니다. 믿음의 형제들의 연합과 동거는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보배로운 기름과 헐몬의 이슬(2-3절)
그렇다면 성도들이 연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교회로 모여서 지내는 일에는 불편함도 있고 수고도 있고 긴장도 있고 갈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렇게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입니까? 형제들의 연합과 동거가 선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의 이러한 복됨과 아름다움을 두 폭의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보배로운 기름입니다. 다윗은 교회의 복과 아름다움이 마치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2절)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에 위임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레 8:1-13). 아론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졌을 때에 그 기름은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아론의 옷깃에까지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아무나 함부로 만들거나 사용할 수 없는 거룩한 기름으로(출 30:22-33),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과 같은 직분자를 세워서 하나님께 성별하거나 성소의 기물들을 하나님께 성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관유(灌油)였습니다(출 29:7; 레 8:10-12; 21:12 참조).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그 보배롭고 거룩한 기름을 흠뻑 부어주셨습니다. 그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머리에 부어졌을 때에, 그 기름은 아론의 머리로 흐르고 수염을 타고 어깨와 제사장의 모든 의복을 적시고 소매 끝까지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의 복과 은혜가 교회 위에 부어져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지체들에게 은혜가 흘러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은혜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복과 아름다움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헐몬의 이슬입니다. 다윗은 교회의 복과 아름다움이 마치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3절) 같다고 하였습니다. 헐몬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만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산입니다. 하나님은 헐몬 산에 이슬이 풍성하게 내리게 하셔서 그 이슬이 모여서 시내와 강을 이루어 메마른 땅인 시온의 산들에까지 흘러내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는 방식입니다. 헐몬에 이슬이 내리면 시온의 산들이 해갈함을 받는 것처럼, 교회 안에는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물줄기가 직분자들의 섬김과 은혜의 방도들의 시행을 통해 교회의 지체들에게 흘러내려서 뭇 영혼들이 해갈함을 얻게 됩니다. 교회에는 은혜의 물줄기가 있습니다. 교회와 같은 곳은 이 세상에 또 없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3절)
하나님은 “거기서” 곧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가 있는 교회에서 복을 명하셨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3절).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명하시는 복은 구원의 복, 곧 영생 복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영생”이라는 말이 흔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다윗은 시편 133편에서 영생을 노래했습니다. 우리들의 복과 은혜는 지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영원히 모든 성도들과의 연합 가운데 거하면서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 외에는 이러한 복과 은혜가 없습니다. 세상은 이런 복과 은혜를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품안에서만,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 안에서만 이러한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복을 베푸시는 곳이요, 복과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복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이렇게 감탄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보라,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우리에게 교회가 있다는 사실, 우리가 한 지역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 우리 옆에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교회가 없는 사람은 집이 없고 가족이 없고 혈육이 없고 형제가 없는 외로운 사람과도 같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형제들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실제적인 하나됨을 경험하며 공유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집이고 성도들은 우리의 형제요 가족입니다(막 3:34 참조). 우리는 참으로 크고 영광스러운 가문에 속하여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된 것을 인해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성도들이 한 교회를 이루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일에는 많은 긴장과 갈등과 불편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위에 부어지는 은혜의 기름부음을 생각하고, 교회 안에 흐르고 있는 은혜의 물줄기를 생각하고 이 은혜의 품에 항상 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물줄기가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려서 은혜의 물줄기를 끊어뜨리기 위하여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의 장(場)인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고자 하는 사탄의 궤계를 능히 막고 대적해야 합니다.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아 2:15). 이를 위해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면서(엡 4:3),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다른 지체들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어 우리가 받은 복과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잘 흘려보내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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