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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병철 안

240915 나를 좇으라

요 1:43-51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만나셔서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셨다”고 하셨는데(43절), 이 동사는 안드레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요 1:41)고 했을 때에 사용된 똑같은 동사로 “찾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빌립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미리 아셨고 예수님은 빌립에게 찾아오셨고 그를 발견하셨고 그와 만나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점에서 다 빌립과 같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고 잃어버려진 자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셨고, 우리를 만나주셨고, 우리를 발견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수님께 발견된(found)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찾으신 바가 되고 예수님께 발견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좇으라(43절)

예수님은 빌립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43절). 이 말씀은 한 인생이 주님께로부터 들을 수 있는 가장 복된 말씀이고 위로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빌립에게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 내가 너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게로 오라,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내 제자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빌립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초청입니까? 이 초청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복음으로 부르실 때, “아멘!” 하며 오십시오.


“나를 좇으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좇고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했고,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인생의 목적도 알지 못했습니다. 향방 없는 삶을 살았고 목적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세상을 따라갔고, 세상의 유행을 좇으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와 보라(44-46절)

예수님을 먼저 만나 예수님을 따르게 된 빌립은 이제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생각하고 그에게 찾아갔습니다(43절).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약속하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알고 메시아를 기대하며 기다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빌립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았습니다(헬, 휴리스케이). 그리고 그에게 가장 흥분되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나다나엘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절). 여기에서도 “만났다”는 동사는 “찾았다(헬, 휴레카멘)”는 뜻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어쩌면 이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도 나사렛을 중요하게 언급하였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정착했던 곳이 바로 나사렛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두고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고 하였습니다. 나사렛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마을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를 귀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53:3). 구약성경에 “나사렛”이라는 지명 자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주목 받지 못하고 멸시를 받는 마을 나사렛은 메시아에게 잘 어울리는 마을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 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come and see)”(46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빌립이 나다나엘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방식이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하였고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게 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47-51절)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나다나엘을 가리켜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이스라엘 사람다운 사람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이스라엘 사람답게 그의 관심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오실 메시아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다웠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처음 만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미 잘 알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놀라며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절)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무화과나무 아래는 나다나엘의 오랜 기도와 묵상의 장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현재시제 분사 ‘온타’). 랍비문헌에서 무화과나무는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장소로 자주 언급됩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를 기도하는 장소, 말씀 묵상의 장소로 삼았을 수 있습니다(슥 3장 참조). 빌립이 그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예수님께서 보셨다니, 그것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이제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고, 이제 막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51절). 이 말씀은 야곱이 돌베개하고 잠들었다가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창 28장). 하늘에 사닥다리가 놓여져있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칼빈은 이것을 예수님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보다 온전하게 이해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앞으로 예수님의 더 큰 영광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발견되었습니까? 여러분을 발견해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나를 좇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으셨습니까? 마다하지 말고 예수님을 좇으십시오.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찾아가 만나야 할 이들에게 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고 말하십시오. 그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거든 “와 보라”고 하십시오. 복음이 그들의 귀에 들려지게 하십시오. 그들로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들도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하고 고백하게 하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더 큰 영광을 보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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