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요한복음 5장 1~18절
읽을말씀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복음 5장 8-9절).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일어난 ‘세 번째 표적’입니다(참고. 첫 번째 표적: 물이 포도주로 바뀜. 두 번째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치심). 특별히 이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난 것으로, 이후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나셨습니다(17절, ‘내 아버지’).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시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17절,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안식일 제도에 맞서, 참된 안식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베데스다 못,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해 갈릴리 가나에 가셨던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기쁨의 축제일을 맞아, 세계 곳곳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의 뒤편에는 아주 비참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성전 양문 곁에 있는 한 못으로 “베데스다”(자비의 집)라고 불렸습니다. 이 못들에는 수많은 병자(맹인, 신체적 장애, 질병 등)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하며 단지 그곳에 전해져 오는 미신적 신화(3-4절,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맨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를 유일한 소망으로 붙잡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병자의 무리 가운데는 38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그는 병이 나을 것이라는 아무런 기대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이 병자를 ‘보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현재 그가 처한 (병에서 나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바라느냐?” 병자는 지금 자신에게 묻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누군가 자신을 베데스다 못에 밀어 넣어 주는 (미신적)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그것은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러자 병이 즉시 사라졌고, 그 사람은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 날은, 다름 아닌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논쟁]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르면, 안식법을 어기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 관련하여 그들이 지켜야 할 수많은 법과 규율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법들이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고 훼손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유대인들은 제 4계명을 따라, 안식일에는 모든 육체적인 노동을 금지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평일에 하던 일을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어떠한 질병의 치료 행위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규율에 갇혀, 유대인들은 정작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38년이나 병에 고통 받던 자신의 이웃이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안식일에’ 병 고침을 받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한편, 병 나음을 받은 환자는, 처음에 자신을 고치신 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다시 그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네가 나았으므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14절). 여기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 곧 하나님과 그 능력에 대한 우상적인 숭배와 불신으로써, 예수님은 그러한 죄 짓기를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항상’ 세상을 다스리시며 보존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단순히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어떠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예수님 또한 하실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이 세상에 ‘참된 안식’을 회복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내 자신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여기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생각하기: 참된 안식의 주인]
‘안식’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안식 개념이 처음 나타나는 본문은 창세기 2장 1~3절입니다. 하나님은 7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그 일들, 곧 창조의 행위를) 멈추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멈추신 이유는 그분이 하시던 모든 일들이 ‘완성’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이란 그냥 단순히 어떤 육체적 노동을 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었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은 창세기 3장에 이르러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최종 목적은 ‘완성되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의 회복’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구약의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적 노동을 쉬는 날이 아니라) ‘장차 경험하게 될 안식의 회복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경험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가운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이후 그들은 안식일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장차 회복될 종말론적 안식을 믿음으로, 그 안식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안식의 참 뜻을 외면한 채, 단순히 그들이 지켜야 할 법과 규율을 얽매여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이 돌아보아야 할 이웃의 삶까지도 비난하고 구속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은 그분이 참된 안식의 주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종말론적 안식의 회복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영원히 ‘완성’되었으며 완전히 ‘종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직 예수님을 통한 새 창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참된 안식을 얻고, 안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일’은 예수님이 안식을 완성하신 ‘부활의 날’로써, 이 날에 우리는 함께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기대합니다. 따라서 주일에 우리는 잠시 자신을 위한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교회의 일에 동참하면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안식은 단지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가는 행위에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날’이 ‘주의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날을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와 교회의 모습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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