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가스펠 링크: 독사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었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어요.
본문: 민수기 21장 4-9절
요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자기 힘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간 광야를 떠돌며 광야에서 삶을 마쳐야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갔다면, 그들은 광야를 지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고 대신 광야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힘과 지혜를 의지하던 옛 습관을 버리는 반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악한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40년의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 40년을 시작했던 가데스로 돌아온 이후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40년이 지나고 세대가 교체된 것입니다. 40년 전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가나안 땅에 대해 악평했던 출애굽 1세대는 대부분 죽었고 출애굽 2세대가 주를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부모세대와는 달랐을까요?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4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르산이라는 곳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돌아서 가고 있습니다. 사실 에돔 땅을 지나서 가면 가나안 땅으로 훨씬 더 쉽고 빠르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대신에 남쪽 홍해 길을 따라 둘러 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가야했을까요? 에돔 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민 20:14-21 참조).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북쪽에 있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인가? 가나안 땅으로 곧 바로 가게 하지 않으시고 에돔 땅을 빙 둘러 가게 하시는가? 하나님께는 에돔 땅을 통과하게 가게 하시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인데 왜 이렇게 우리를 대우하시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는 마음의 여유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새번역]
그들은 무엇에 대해 원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불평하며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을 원망했습니다(‘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또 먹을 것도 없다고 불평했습니다(‘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먹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물도 주셨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와 짐승들까지도 흡족하게 먹고 마실 물이 반석에서 나게 하셨습니다. 광야를 걷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죽은 사람은 있어도,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어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사라지면, 이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다 못마땅하게 보입니다. 그러니 만나를 두고 “이 박한 식물(”이 보잘것없는 음식“)”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싫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백성들의 회개
불평과 원망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처사에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있는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한 두 마리를 보낸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독사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 보낸 뱀을 불뱀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 뱀에게 물리면 불이 붙은 것 같이 뜨겁게 열이 나고 고통스럽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큰 고통 속에서 죽었고 또 죽어갔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뱀에 물려 죽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뱀이나 전갈, 맹수와 같은 위험으로부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낼 때,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던 손을 거두시고 대신 불뱀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나아와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한 자신들의 죄를 자백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주길 요청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신실하게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뉘우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큰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징계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점점 더 악하게 되어 영원히 멸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뉘를 뉘우치고 모세가 기도해주기를 요청했을 때, 모세는 기꺼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그리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알려주신 방법은 놋으로 된 뱀을 만들어 그것을 장대 위에 높이 달게 하시고, 그것을 쳐다보면 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쉽고 단순합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생각과 너무나 다른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불뱀에 물린 자마다 ‘뱀에 물린 상처를 물로 씻으면 살리라’고 하신다든지, ‘지혈을 하여 입으로 독을 빨아내면 살리라’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누구나 다 그렇게 따라했을 것입니다. 그런 명령은 충분이 이해할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라 그러면 살리라’는 명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이 살 길임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하셨다면,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그 방법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물로 씻는 자신의 행위 또는 지혈하여 독을 빨아낸 자신의 행위 때문에 살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지혜, 경험과 같은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통해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개를 들고 놋뱀을 바라볼 때, 살 수 있었습니다. 반면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거절했던 이들은 죽어갔을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먼 훗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높이 들린 뱀을 자기 자신에게 비유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광야에서 장대에 달려 높이 들린 놋뱀을 믿음으로 바라본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인자 곧 예수님 자신을 믿음으로 보는 사람은 다 살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면 살리라는 말씀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으라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은 어리석게 보이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 사람들에게도 이 말은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가까이 하기도 싫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무로 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이 그들에게 혐오스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이 보기에도 그 말은 미련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무기력한 모습으로 죽어간 죄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매우 어리석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치료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꺼려지고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내려놓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치료해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 한 쪽 편에 있던 강도를 생각해봅시다. 그 강도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강도도 자기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는 믿음으로 자기 옆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였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대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이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립니까? 그렇다면 이 말이 누구의 말씀인지 생각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지식과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죄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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