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보냄을 받아 나갔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그들이 행한 일들을 예수님께 보고하며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중 한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율법사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영생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율법사는 영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했던 질문 안에서 영생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사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하여 얻은 의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습니다.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다시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 예수님의 물음을 풀어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행하여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하도록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너는 그 율법이 무엇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이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여야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완전히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만족시키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예수님께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29절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 율법사는 자신이 옳다, 의롭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하신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의로움을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이든 내 자신처럼 사랑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자신의 의로움을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자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어 그가 그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내려가다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은 높은 곳(해발 750미터)에 위치해 있었고 반면 여리고는 낮은 곳에 자리한 성읍(해수면 이하 250미터)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한 산과 그늘진 골짜기로 이어져 있어서 실제로도 매우 위험한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방치된다면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잠시 후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렀는데 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수종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으니,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한 채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강도를 만날 수 있으므로 빨리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을 핑계 삼아 피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강도 만난 자를 이웃으로 생각하거나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지나간 후 이번에는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강도만난 자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보고 품은 긍휼의 마음은 단순히 감정을 품는 것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바르게 평가하려면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를 원수로 여겼습니다. 원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한 혈통을 가진 동족이었습니다. 모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었고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고, 두 나라는 각각 바벨론과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많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끌려가 흩어졌고, 대신 앗수르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사마리아에 들어와 살면서 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합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앗수르 사람들과 북이스라엘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혈통의 순수성도 잃어버렸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변질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멸시를 당했습니다. 이후 예수님 당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이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적대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하며 상대하지 않았고 한 자리에서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은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원수였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 했을 때 보였던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지나가시던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지나게 하지 못했던 사마리아인들.
이처럼 사마리아인들을 그토록 미워하며 원수처럼 대하던 유대인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를 부탁하였습니다. 비록 자신과 같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미워하는 유대인이었지만, 그를 가엾게 여겼고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보여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출 22:21)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3:5) 또 역대하 28장 8-15절에는 실제로 사마리아인 군사들이 포로로 잡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친절과 긍휼을 베푼 일이 하나의 모범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군사들이 선지자 오뎃의 꾸짖음을 받고 유다 포로들을 돌려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중에서 옷을 취하여 벗은 자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대하 28:15)
이와 같은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사마리아인은 기꺼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며 힘을 다해 도와주었고 그의 친구가 되어준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그러자 그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이 누구이며, 참된 이웃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하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계명을 자신이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지키고자 하는 지를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율법의 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그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율법사는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보여준 자비와 긍휼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했던 율법사 역시 유대인으로서 그 자신도 사마리아인들을 원수로 여기며 그들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품고 있던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인이 자기를 미워하고 짐승처럼 취급하는 자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 율법사는 자신이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모든 사람, 설령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라할지라도 그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그의 친구가 되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율법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하신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우리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을 이웃으로 여기며 사랑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심지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그를 사랑하고 좋은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이런 방식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율법이 명하는 대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율법을 행함으로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의와 생명을 얻으셨고 자기를 믿는 우리에게 의와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대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처럼 하여야 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격 없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통해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에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 나를 선하게 대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마 5:43-4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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