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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벨직 신앙고백] 서론2 귀도 드 브레의 생애

서론2. 귀도 드 브레의 생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


귀도 드 브레는 1522년 벨기에 남부, 프랑스와 접경지대에 위치한 몽스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린 신자였는데, 귀도 드 브레를 임신 중에 한 순회 수도사의 설교를 들으며 속으로 “제 뱃속의 아이가 저런 주님의 말씀의 설교자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라났던 귀도 드 브레가 어떻게 개혁신앙을 접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기록을 통해 적어도 24살을 전후하여(1546/7년)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540년대 벨기에는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일례로, 1548년에 두 목사 부부가 제네바에서 영국으로 가기 위해 몽스에 며칠 머물며, 그 지역의 개혁신앙을 가진 몇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이 일로 당국에 잡힌 두 목사는 화형을 당하고, 두 부인 중 한 명은 산채로 매장을 당하는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순교를 목격한 몽스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혁신앙을 가지게 될 때 어떤 값을 치러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벨기에의 개혁교회는 참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로 불렸습니다.



귀도 드 브레의 3차례의 망명과 벨기에 사역


귀도 드 브레가 개혁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그의 생애는 세 차례의 망령 시기와 세 차례의 벨기에 사역 시기로 뚜렷하게 나누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기이한 섭리로 귀도 드 브레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1차 망명(1548-1552, 잉글랜드)과 벨기에 사역(1552-1556, 릴을 중심으로)


귀도 드 브레는 1548년 잉글랜드로 망명을 떠납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가 다스렸습니다. 에드워드 6세의 조력자들은 주로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잉글랜드는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마르틴 부처, 피터 버미글리, 요하네스 아 라스코와 같은 탁월한 개혁신학자들이 초빙되어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 신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귀도 드 브레는 이런 개혁파 신학자들이 있던 잉글랜드에서 4년 동안 머물며 그들에게 신학과 교회의 질서를 배웠습니다.


1552년 귀도 드 브레는 벨기에로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 벨기에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릴를 본거지로 두고서 벨기에 전역을 비밀리에 순회하며 설교하는 순회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틈틈이 글을 써서 [기독교 신앙의 표지](1556)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그 책이 출판되던 해인 1556년은 펠리페 2세가 스페인의 황제로 즉위하던 해였습니다. 개신교도들을 증오했던 펠리페 2세에 의해 벨기에 지역에도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차 망명(1556-1559, 프랑크푸르트와 스위스 로잔과 제네바)과 벨기에 사역(1559-1561, 도르닉을 중심으로)


박해가 심해지자 귀도 드 브레는 지하교회 신자들을 모아 프랑크푸르트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 해에(1556년)  종교개혁자 칼빈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를 방문하러 왔다가 귀도 드 브레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귀도 드 브레는 데오도르 베자가 있는 로잔으로 가서 2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1558년에 베자와 함께 제네바에 가서 1년 동안 머무르며 칼빈과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웁니다.


1559년 귀도 드 브레는 다시 조국 벨기에로 돌아와, 도르닉이라는 도시에서 비밀 지하교회였던 “종려나무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종려나무 교회는 큰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온 교회였습니다. 귀도 드 브레는 이 교회에서 설교 사역을 하였고, 이 교회의 교인이었던 경건한 여인 카뜨린느 라몽과 결혼하는 복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귀도 드 브레가 교회를 잘 세워가는 중에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도르닉의 지하 교회 성도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도시 전체를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도르닉의 주요 거리들을 행진하면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등의 돌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당국자들이 도르닉의 비밀 교회를 색출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한 순간에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귀도 드 브레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들이 반역자들이 아니고 참되고 성경적인 복음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귀도 드 브레는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 사람들인지를 변호하고 밝히고자 그간 자신이 정리하였던 [신앙고백서]를 인쇄하여 도르닉의 총독과 더 나아가서는 스페인의 펠리페 왕에게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귀도 드 브레는 도르닉의 총독의 성벽 너머로 그 신앙고백서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 신앙고백서가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서]입니다. 1561년 11월 2일, 성벽 너머로 던져진 꾸러미가 발견되었고,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거나 배포한 자는 누구든지 체포하여 처벌하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다행히 귀도 드 브레는 무사히 도르닉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얼마 후 그가 은신처로 사용했던 방이 알려지면서, 그의 글과 편지들은 모두 소각되고 말았습니다.



3차 망명(1561-1566, 프랑스 세당을 중심으로)과 벨기에 사역과 순교(1566-1567, 발랑시엔을 중심으로)


프랑스로 망명한 귀도 드 브레는 그곳에서 위그노들의 목사로서 몇몇 회중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이곳에서 비로소 가족들과 함께 잠시나마 지내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위그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1563년부터는 예배의 자유가 선언된 세당이라고 하는 도시에서 3년 동안 머물며 많은 설교와 서신 왕래를 하면서 집필 활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조국 벨기에와 그곳에 두고 온 지하 교회 성도들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망명 생활 중에도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며 설교 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벨기에 남부에 있던 발랑시엔이라는 도시의 교회가 드 브레에게 자신들의 목회자가 되어달라고 청원하였고, 드 브레는 그곳의 목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들판으로 운집하게 되었고, 벨기에의 종교개혁은 금방이라도 성공할 것 같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펠리페의 군대는 이를 방관하지 않았고, 결국 발랑시엔은 1567년 종려주일(3월 23일)에 포격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귀도 드 브레는 성 제리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고, 그 주일에 발랑시엔은 함락되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 도시를 빠져나와 프랑스로 피난을 가던 귀도 드 브레는 그를 알아본 한 사람의 신고로 붙잡혔고, 발랑시엔의 감옥에서 7주 동안 모진 고문과 학대를 받았고 1567년 5월 31일 발랑시엔의 시청 앞 시장 광장에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귀도 드 브레는 참으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한 사람이었습니다(마 10:28).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서 말씀의 사람이 되어갔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세우고 격려하고 도우며 교회를 섬기는 삶을 중단 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위험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벨직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를 도왔던 벨기에의 교회들도 같은 희생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복음의 증인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다보면 우리에게서도 보석과 같은 귀한 열매들이 맺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벨직 신앙고백 해설> ‘서론 2’(41-52)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책을 직접 읽어보시고, ‘서론 3, 귀도 드 브레의 편지’(53-61)도 꼭 함께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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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을 위한 질문


1. 벨기에의 개혁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까?



2. 귀도 드 브레의 세 차례의 망명과 벨기에 사역을 화살표 등으로 지도에 표기해 보세요.



















나눔을 위한 질문


1. 귀도 드 브레의 생애를 읽으면서 가장 감명 받은 부분을 이야기해 봅시다.



2. 귀도 드 브레가 아내에게 쓴 옥중편지에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 교리로 아내를 위로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교리가 우리에게 위로를 주었던 경험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3. “나는 지금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고백하건대, 이전에 나는 내가 지금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것(주를 위한 고난과 박해와 죽음)에 대해 설교할 때에, 마치 맹인이 색깔에 대해 말하듯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체포되어 옥에 갇힌 후에 나는 나의 지난 평생 동안 얻었던 것보다 더 많은 유익을 얻었고 평생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지금 아주 좋은 학교에 있습니다”(57).


귀도 드 브레가 아내에게 쓴 편지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학교”에서 배우는 시간을 갖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고난의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습니까? 어떤 배움과 유익이 있었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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