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 사후 헬라 제국의 분열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헬라 제국의 큰 변동을 가져옵니다. 당시 알렉산더에게는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동방 지역을 차지한 셀류키드 왕조 사이에 끼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항상 두 권력 사이에서 충돌과 긴장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프톨레미 왕조(주전 320-198년)와 70인역 성경
먼저 유대 지역을 차지한 것은 프톨레미 왕조였습니다(주전 320년). 프톨레미는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러 온 것처럼 위장하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손쉽게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120여년을 안정적으로 지배했습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은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전과 같이 세금만 징수할 뿐, 유대인들의 내정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는 이전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했지만, 프톨레미 왕조 시대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프톨레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곳에는 알렉산더가 세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도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거주하였습니다. 프톨레미 2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더 발전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하기 위해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조서를 보냅니다. 엘르아살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구약성경에 정통한 장로 70여명을 선발하여 성경을 번역하게 합니다. 이렇게 70인의 장로들이 번역하였다고 해서 이 성경을 ‘70인경’이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번역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 사회를 넘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셀류키드 왕조(주전 198-164년)와 유대인 박해
셀류키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주전 223-187년)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이끌어냅니다. 주전 198년, 그는 프톨레미 왕조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안티오쿠스 3세도 이전 통치자들처럼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신앙과 정치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지배하는 나라는 바뀌었지만, 유대 사회와 유대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4세 때 상황은 크게 달라집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을 가리켜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라고 지칭하길 좋아했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에피마네스’(미친 사람)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철저한 헬레니즘 신봉자로서 유대인들에게도 헬라의 언어와 관습을 강요하였습니다. 또 그는 재정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정통 제사장 가문 출신의 대제사장을 몰아내고, 후원금을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제사장직을 팝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그럴수록 안티오쿠스의 박해는 심해져서, 그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법을 강요하며 어기면 사형에 처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성전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기까지 합니다. 에피마네스의 박해와 신성모독은 주전 167년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번제단에서 돼지를 잡아 제우스에게 희생제물로 드리는 사건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마카비 혁명과 하스몬 왕조
예루살렘 북쪽 모데인이라는 지역에 유서 깊은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의 연로한 제사장 맛다디아가 있었습니다. 그에겐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안티오쿠스 4세가 사람을 보내 제우스 신을 위해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전했습니다. 맛다디아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이 제단으로 나와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맛다디아가 나서서 그 유대인과 안티오쿠스 4세가 보낸 사자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합니다. 마카비서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마타디아가 그것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에 불타서 뛰어 나가 제단에서 그를 죽이고, 동시에 왕의 부하도 죽였다. 마치 비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시므리를 죽인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서 마타디아는 큰 소리로 성중에 외쳤다. ‘누구든지 율법을 열렬히 섬기며 계약을 지킬 자는 나와 함께 나오라!’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언덕으로 도망가 마을에 있던 그들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떠났다”(마카비상 2:24-28). 그러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이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합류하기 시작했고, 셀류키드 왕조에 대한 본격적인 무력 저항이 시작됩니다. 이들은 게릴라 전법으로 셀류키드의 군대를 괴롭혔습니다. 주전 166년 맛다디아가 죽고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아버지를 이어 유대인들을 이끌게 됩니다.
유다 마카비는 게릴라전으로 큰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사실 셀류키드는 파르티아와 전쟁 중이었고, 내부 상황도 좋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군대는 주전 164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여 재봉헌합니다. 성전이 돼지 피로 더럽혀진지 3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축제로 정했는데, 이것이 수전절(하누카)이란 절기의 배경입니다(요 10:22).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재봉헌하였지만, 그렇다고 유대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셀류키드 왕조는 안티오쿠스 4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왕위쟁탈전에 시달리게 되고, 유대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었고, 유다 마카비는 독립 전쟁에서 결국 전사하게 됩니다.
유다 마카비의 뒤를 이어 막내 동생 요나단이 군대를 이끌게 됩니다. 요나단은 정치적 능력이 좋았다고 합니다. 셀류키드 왕조 내부의 왕위 경쟁이 심화되자, 그들은 서로 요나단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요나단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였고, 주전 152년에 셀류키드의 왕으로 자처하던 알렉산더 발라스로부터 대제사장직을 받고 대제사장의 옷을 입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유리한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이 일로 전쟁에 참여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마카비 가문에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이방인에게 대제사장직을 받는 모습을 보며, 마카비 가문도 하나님의 율법보다 자신의 정치 권력을 우선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셀류키드 왕조의 내분을 이용하였던 요나단은 결국 셀류키드 왕조의 한 장군의 손에 살해당하여 죽습니다.
이제 맛다디아의 아들들 중 생존한 사람은 둘째 아들 시몬뿐이었습니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직과 유대의 통치권을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그해 셀류키드 왕조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인정받습니다(주전 142년). 주전 586년 바벨론에게 주권을 빼앗긴 이후 440여년 만에 누리는 독립이었습니다. 시몬은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대제사장과 통치자로 인정받게 되고, 이후 마카비 가문은 계속해서 대제사장과 통치자의 자리를 물려받게 됩니다. 마카비 가문은 이제 하스몬 왕조라 불리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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