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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슬기로운 성경개관(72) 요한일서

요한일서 개관 | 성도의 사귐(교제)

요한일서 1:1-4


요한일서의 서론


요한일・이・삼서를 함께 묶어 요한서신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밝히는데요, 이 말은 직분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연로한 사람이라는 뜻이기에, 요한서신은 요한이 노년에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주후 90년 전후 어느 시점에, 오래 머물며 사역하였고 그의 무덤도 있었던 에베소에서 이 편지들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요한일서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은 ‘우리’와 ‘너희’와 ‘저희’(그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편지의 저자인데요,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우리’와 ‘나’를 혼합해서 사용합니다. ‘나’는 사도로서 권위 있게 요구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면,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 사귐 안에 있는 공동체로서 사귐을 권면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너희’는 이 편지의 대상이면서 ‘우리’와 같은 복음을 듣고 사귐 안에 있는 교회와 성도를 가리키고, ‘저희’는 ‘우리’와 대립하여 떠난 자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로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저희’를 가리켜 적그리스도(2:18), 거짓 선지자(4:1)라고 부릅니다. 요한일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표현으로 ‘사귐’과 ‘사랑’이 있고 또 ‘분립’과 ‘미혹’이 있는데요, ‘너희’를 향해서 사귐과 사랑을 권면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떠나간 ‘저희’의 미혹에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1:3-4에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한과 요한이 속한 공동체는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었는데, 이 편지를 통해 ‘너희’도 이 사귐 안으로 들어오길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사귐 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의 내용


요한일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 ‘사귐’(코이노니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주제가 ‘사귐’이고, 기록 목적은 이 사귐의 증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수평적 측면에서 ‘우리의 사귐’이 있고, 수직적 측면에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습니다(1:3). ‘사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어떤 공통적 대상에 함께 참여함으로 맺게 되는 사귐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게임이라는 공통 대상에 참여함으로 게임 친구들로 사귐을 만들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요한일서가 말하는 사귐은 어떤 공통적 대상에 함께 참여하는 사귐일까요? 바로 “생명의 말씀”(1:1)입니다.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보고, 만져보았다고 말하며, 이 생명의 말씀을 ‘너희’에게 증거하여 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증거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과 교제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도의 교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사귐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한일서 2:19을 보면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었습니다. 2세기에 영지주의와 맞서 힘든 싸움을 감당했던 교부 이레니우스는 요한일서의 이단을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영지주의 이단의 분파라고 말했습니다. 영지주의란 간단히 말해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자들을 말합니다. 육은 악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였지요. 문제는 이렇게 이단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비슷했고, 그래서 한 동안 ‘우리’라고 생각하고 함께 지내다가,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갈라서서 분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것이 문제입니다. 같은 것을 말하는 ‘우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서로 다른 것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관계에서는 참된 사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같은 믿음의 내용에 참여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귐은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고 복된 새 관계의 누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 사귐과의 결별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적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 교회는 사귐의 뿌리가 병들게 되고 오래가지 않아 죽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사귐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에서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떠나 반역한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다가 심판하셔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사귐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사귐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해주셨다는 ‘속죄제물’(2:2, 4:10)이라는 말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 오신 예수님은 사귐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귐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을 드릴 수도 없고, 드릴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사귐을 갈망하셨고 먼저 사랑하셔서 이 사귐의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속죄와 사죄의 영원한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성도의 교제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큰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한 사랑을 나누는것이 성도의 교제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따라 우리의 것을 기꺼이 즐겁게 나눌 수 있는 그런 사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된 우리는 ‘자기아’ 의식을 버리고 ‘교회아’의 의식을 길러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한 몸처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복된 사귐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세상 속에 많은 사귐이 있지만, 성도의 사귐은 그 모든 사귐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사귐과 성도의 사귐의 차이는 무엇인지, 성도의 사귐의 탁월함과 복됨이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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