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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일과 신앙(2) : 일, 왜 이렇게 힘든가

일, 왜 이렇게 힘든가

하나님은 일을 축복하셔서 각 사람이 가진 은사와 자원이 온전한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쓰이도록 하셨지만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저주가 임했습니다. 일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죄로 크게 오염되었습니다. 일의 저주가 인간의 타락과 관련되어 있기에, 우리는 먼저 죄가 어떻게 일을 뒤틀어 놓았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모든 열매는 마음껏 먹되, 단 하나의 나무만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이런 의미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너희는 내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가 날 믿고 사랑한다면 순종해야 한다.” 이 명령을 통해 인류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삼으며,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뱀의 교묘한 거짓말에 속아 아담과 하와는 이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철도를 달리도록 설계된 기차가 선로에서 벗어나면 고꾸라져서 망가지듯이 인류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함으로 복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1. 사람의 타락으로 일이 저주를 받았다 / 창세기 3:16-19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사람과 피조물의 관계도 끊어지게 됩니다. 죄의 영향은 삶 전체에 베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엇보다 일에도 엄청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죄에 오염된 노동은 고통스러운 수고(창 3:17)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지만 총체적으로 죄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1) 열매 없음 : 18절에서 이제 땅은 풍성한 열매 대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놓았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일에게 닥친 저주 가운데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도 결실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일을 시작했지만 성취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오히려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수고하여 농사를 짓지만 태풍이 와서 망쳐버리기도 하고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가수가 되고자 하지만 기회를 잡지 못해 데뷔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혹 매번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의 삶에도 여지없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습니다.


(2) 수고가 더해짐 : 16절은 출산에 고통이 크게 더해져 수고하여 자식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절에 보면 남자도 죽는 날까지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출산과 일에 수고가 더해진 것입니다. 혹시 아이를 낳고 일도 하는 여자는 두 배로 수고하는 게 아닌가 묻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본문의 의도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고 기쁨인 출산과 일이 저주를 받아, 수고와 고통이 더해졌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진 이유입니다.


(3) 일과 생존이 연결됨 : 17절은 사람이 평생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락의 영향으로 일과 생존이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소위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입니다. 본래 일과 먹을 것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실 때 이미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많이 나게 하신 후에 사람을 거기에 두셔서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지요. 노동과 생존이 꼭 연결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타락 이후에는 일하지 않으면 소산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이 저주를 받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인정하라 : 먼저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히 수고했지만 실패할 수도 있고, 경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과가 없어 실망스럽고,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해서 나의 직업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이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그러니 나에게 더 잘 맞는 일을 찾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정확한 자리에서 열심히 수고하여도 일터에서 주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이 말이 한 번 정한 직업을 바꾸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더 나은 결실과 만족을 위해서 진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뒤에서 좀 더 생각해 보겠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특정한 직업으로의 부르심이라기 보다는 어떤 직업에서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부르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2) 소망을 가지라 : 비록 일이 저주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소망은 있습니다. 다시 17절을 보겠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고 사람은 평생을 수고해야 겨우 먹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땅이 저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비록 우리가 수고를 해야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결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18절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말합니다. 땅은 가시덤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을 채소도 낼 것입니다. 본래 의도한 만큼은 아니지만 일은 여전히 어느정도 열매를 낳습니다. 좌절과 성취를 두루 담고 있으며 아름다움과 천재성을 언뜻언뜻 드러내기도 할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천재성은 원래 노동의 지극히 통상적인 특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 궁극적으로 되찾게 될 것입니다.


2. 일의 의미가 달라졌다 / 창세기 11:4


하나님은 우리를 일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일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섬기시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부르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합니다. 따라서 일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과 세상을 섬깁니다. 이 일에는 사랑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타락은 일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일의 본질을 섬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고, 나의 기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과 성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었습니다. 나의 직업, 내가 하는 일, 나의 연봉이 내가 되었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일은 이제 이웃과 자신을 구별하고, 자신을 더욱 부각시키고, 자신이 더 특별한 존재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타락했습니다. 이것을 팀 켈러 목사님은 “‘선물로 받은 은사를 관리하는 행복한 작업’에서 ‘자존감의 허상을 세우는 신경증적인 반응’으로 일이 변질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바벨탑 사건은 타락한 일의 일면을 잘 보여줍니다. 창세기 11장 4절을 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려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늘에 닿는 성을 쌓고 싶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 우리 이름을 내자 : 성경에서 ‘이름을 낸다’는 말은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일과 성취에서 정체성을 찾습니다. 바벨탑 사건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성을 쌓아서, 자신들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을 잘 해서 어떤 성취를 이룰 때, 우리는 더 존엄한 사람이 될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존엄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지, 그의 기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고대사회부터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은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자주 나의 기능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에게 맡겨진 일을 잘했습니다. 일을 잘했을 뿐인데,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반대로 실패하면 자신이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칼뱅 목사님은 ‘기능’을 판단 기준으로 삼게 되면 상당한 사람들이 무가치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기능으로 판단하지 말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능이나 성취로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이상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저 나에게 필요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게 되겠지요.


여러분 중에도 “내가 일을 더 잘 하기 때문에 내가 더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혹시 계신다면 칼뱅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그분이 받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인간의 악한 의도를 볼 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랑하고 끌어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십시오.” 인간의 기능이나 성취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교만한 시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가치에 만족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더 높은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2)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 사람들이 높은 성을 쌓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뭘까요?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 안에 있는 불안함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뭐가 두려워서 흩어지지 못했을까요? 홍수 심판을 경험하였던 그들은 홍수가 와도 끄떡없는 높고 튼튼한 성을 쌓고 거기에 모여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고,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서로 모여 높은 성을 쌓았습니다. 이렇듯 타락한 이후 우리가 일을 하는 또 다른 동기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일을 합니다. 여기에는 내가 일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으면 나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미래를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이 나쁘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일의 목적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일을 할 때 우리는 일을 통해 기쁨을 얻기 보다는 ‘죽지 못해 일한다’는 표현처럼 삶을 연명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일하게 됩니다.


창세기 11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탑을 쌓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온 땅에 흩어버리십니다. 이런 결과는 오늘날에도 ‘교만’이라는 동기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납니다.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 분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같은 직장에 모여 있다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며 함께 나아가는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가 자신을 더 드러내고 싶어서, 누가 더 많은 공헌을 했는지 따지다가 결과적으로는 의사소통이 안되고 흩어지게 됩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은 본래 경잭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본질적으로 경쟁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교만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만 가지고는 기뻐하지 않으며, 옆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비로소 행복해 한다. 흔히 부유하고 똑똑하고 잘생기면 콧대가 높아진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남보다 더 풍요롭고 더 명석하며 더 훤칠해 보이는 데서 뿌듯함을 느낄 따름이다.” 교만은 결코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대치를 한 껏 올려놓은 후에 떨어뜨려 버립니다. 낮은 자존감을 갖거나, 자학을 하게 되는 것은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성을 쌓는 모습을 보시기 위해 친히 내려오십니다. 이건 문학적인 표현인데요, 사람들은 하늘에 닿을 만큼 크고 높은 성을 쌓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까이 내려와서 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작고 초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신 이유는 성 쌓는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한 마음으로 함께 성을 쌓지만, 쌓은 후에는 누가 왕이 될 것인지, 누가 몇 층에 살 것인지, 자신이 더 나은 존재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이 교만한 시도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이후에 또 한 번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교만한 시도를 멈추게 하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려 할 때, 지극히 크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체를 입고 고난의 삶을 살아가시다가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기능과 성취에서 찾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존귀한 신분, 가치, 정체성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이상 일이나 성취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지 않습니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실패할 수 있고, 그래서 힘들고 실망스럽겠지만, 낙심하고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가치가 그 일에 성취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기능이 떨어지고, 혹 질병이나 사고로 이전의 탁월한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무가치한 존재가 되거나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할 때 우리는 더이상 자신과 타인을 보며 비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일 자체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타락한 사람(악인)과 함께 일한다 / 시편 73편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가장 힘든 게 뭔지 물어보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대답이, ‘사람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상황이 있겠지만, 당장 머리에 딱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네. 바로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폭언이나 성추행을 일삼는 상사, 일머리가 없어서 자꾸 일을 만드는 동료, 뒤에서 험담하고 이간질하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타락한 죄인이고, 그런 죄인들이 함께 일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일과 일터는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성경에서 시편은 특별히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들에 대하여 많이 말합니다. 악인 또는 원수에게 당하는 고통, 괴로움, 분노, 하나님을 향한 하소연 등이 시편에는 아주 많이 나오지요. 그런 시편 중에 시편 73편이 있습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입니다. 지금 아삽은 악인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 악인들은 능욕하고 악하게 압제하고 거만하게 말합니다(8절). 그렇게 악하게 사는데도 항상 평안하고 돈도 많습니다(12절). 아삽은 이들의 형통함과 오만함을 보고 질투가 날 지경이었습니다(3절). 남들은 고난과 재앙도 당하는데, 이상하게 저 악한 인간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5절). 죽을 때라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는데,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평안합니다(4절). 아삽은 이런 악인들을 보면서,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려고 노력한 모든 것이 허탈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악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형통하여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니까요.


성경은 그저 “하나님 뜻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야”라는 식으로 세상의 악과 부조리에 대해 쉽게 단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이 형통하기도 하고 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아삽과 같지는 않더라도 이런 문제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종 겪게 되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인정받고 승진하는 사람은 꼭 성실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사에게 아부를 잘하고, 경쟁하는 동료를 속이기도 하고, 아랫 사람에게 폭언을 일삼으며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승승장구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 생활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런 일들은 예외적인 게 아니라 흔한 일입니다. 학교다닐 때 나쁜 짓을 했던 녀석들이 사회에 나와서는 고생하며 과거를 후회해야 공평할 것 같은데,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차를 타고 근사한 곳을 다니며, 주변에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늘 있는 모습을 SNS로 본다면 아삽과 같이 질투와 분노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만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17절을 보면 아삽은 자신이 어떻게 이런 현실을 극복했는지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악인들 때문에 한껏 기분 나쁜 상태로 성전에 예배드리러 왔습니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문득 악인이 지금 형통하게 살다가 평안히 죽지만, 죽은 후에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삽은 아마도 제사장 혹은 레위인이었을 겁니다.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즉 악인은 죽은 후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닌데, 왜 지금 성전에 들어갈 때 새삼 깨닫게 된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성경의 교리적 지식이 우리의 삶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그만큼 와닿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삽의 경우,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악인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는 교리적 지식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악인의 형통함이 더 현실적으로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악인에 대한 시기와 분노가 마음에 가득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 나아갈 때,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 나에게 별로 와닿지 않았던, 그래서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성경의 교훈이 강하게 와닿았고, 이제는 현실에서 악인의 형통함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 현실적으로 크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21-22절(새번역)을 보면,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나는 우둔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후에 아삽은 이제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생각합니다. 24절,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악인들에게 고통 받는 우리를 주님의 말씀으로 선하게 인도하셔서, 마침내 영광으로 영접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이 현실보다 더 확고하게 믿어질 때, 우리는 진심으로 28절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악인들로 인해 고통받는 일터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악인들에게 당한 고통과 억울함을 뒷담화로 풀지 말고, 하나님께 푸십시오. 시편에는 악인들을 향해 분노하며 무서운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억울함과 분노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하나님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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