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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병철 안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삶과 신앙(2)

최종 수정일: 2022년 11월 15일




불길에 휩싸인 프랑스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프랑수아 1세는 가톨릭 신자이기는 했지만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는 개혁파를 보호하였다. 또 왕의 누이였던 나바르의 마르그리뜨 같은 일부 귀족들이 개신교회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내의 개신교회는 융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개신교에 우호적인 흐름을 깨뜨리는 몇 가지 사건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1528년에 어떤 사람이 파리에 있던 동정녀 마리아 상을 부숴뜨린 것입니다. 범인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상의 머리를 자르고 내동댕이쳤습니다. 이 일로 인해 루터파를 포함한 개신교도들은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 왕국을 병들게 하는 루터파 이단과 다른 종파들’을 뿌리 뽑아 달라고 요청했고, 프랑스 왕은 개신교도들과 그들을 옹호하거나 숨기는 자들까지 처벌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시행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파리 대학교의 새 총장이 된 니콜라 콥은 취임 연설에서 루터의 글을 인용하면서 로마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로마 교회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짊어지게 하고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이 남기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선행이라고 했던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공격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콥이 연설한 이 날은 독일의 개혁자 마틴 루터가 면죄부를 반박하는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의 게시판에 붙였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연설로 인해 로마 교회를 지지했던 파리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거센 반대를 만나게 되었고 콥은 의회에 출석하여 심문을 받으라는 소환장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위험을 느낀 콥은 당국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바젤로 피신합니다. 또 이때에 칼빈 역시 프랑스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니콜라 콥의 취임 연설문 작성에 칼빈이 긴밀히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머물던 집에 관리들이 들이닥쳐 칼빈도 거의 붙잡힐 뻔 했지만 침대 시트로 만든 밧줄을 타고 창문 아래로 내려가 가까스로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도망자 신세가 된 칼빈은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파리를 떠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칼빈은 “사를르 데스뻬빌”(Charles d’Es-peville)이라는 가명으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후에 칼빈은 이때를 되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약 20년, 거의 약 30여 년 전부터 종교적인 억압 속에서 지냈다. 나는 더 이상 이 무서운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서 죽기를 바랐다. 아니 적어도 나는 내가 말하지 못하도록 내 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불안했던 칼빈의 삶은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 만나게 된 친구 루이 뒤 띠에(Louis du Tillet)의 도움을 받으며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뒤 띠에의 집안은 프랑스 왕의 호의를 얻고 있던 귀족 집안이었고 그의 가족 중에는 나라의 요직에 있던 인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앙굴렘에 있던 뒤 띠에의 집에는 매우 좋은 서가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칼빈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당시 칼빈이 다니엘이라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으며 하나님께서 앙굴렘 같은 조용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일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로마 교회를 바르게 회복하려고 하는 개혁주의자들의 마음에 담겨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던 『기독교강요』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칼빈이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도록 만든 『벽보 사건(플랜카드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시행되던 미사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벽보가 프랑스 전역의 도시들에 나붙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정면으로 맞서려고 만든 교황 미사의 무시무시하고 크고 중요한 남용에 관한 참된 조문」이라는 제목의 벽보에서 미사를 비판하는 데 사용된 본문은 히브리서 7장 27절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는데, 로마 교회에서 미사라는 이름으로 매일 다시 제사를 드리고 또 사제에 의해 죄를 속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일임을 들어 로마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인해 온건함을 유지했던 왕은 크게 분노했고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벽보 사건에 관여했다고 생각되었던 서른여섯 사람이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리고 칼빈은 프랑스를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하고 1535년 스위스 바젤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칼빈은 니콜라스 콥과 올리베탕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또 시몬 그리네우스(바젤 대학의 해석학자)와 불링거(바젤과 취리히의 개혁자), 여러 목사들을 만나 교제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수 년 동안 공들여 왔던 그의 책 『기독교강요 초판』을 바젤에서 출판합니다. 칼빈은 이 책을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는데, 헌정사에서 칼빈은 이 책을 쓴 두 가지 목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이 책을 통해 왕에게 핍박을 받은 루터파는 이단이 아니라 참된 기독교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프랑스의 개신교인들을 옹호하고자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로지 종교에 열의를 보이려는 기미를 내비치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을 가진 자가 될 수 있게 해줄 어떤 기본 원리들을 전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칼빈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의 목적은 단지 약간의 기초 원리를 제공하여 종교에 대해 작은 열정이라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나의 조국 프랑스 사람을 위해 노력을 바친 것인데, 그리스도를 향한 목마름과 굶주림에 놓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조그만 지식마저도 불어넣어 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의도임을 이 책 스스로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만, 이 책은 아주 단순하게 교훈의 초보적인 형태를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1535년에 출판된 기독교강요 초판은 1559년 최종판이 나올 때까지 다섯 번에 걸쳐 개정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에는 성경의 진리가 응축되어 있었고 또 말틴 루터나 필립 멜랑히톤, 마틴 부처, 츠빙글리 같은 동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정을 거듭하면서 어거스틴이나 크리소스톰, 아타나시우스 같은 교부들의 저술들을 통해 보강되었습니다. 칼빈은 이 책이 개혁교회의 경건의 교과서이자 성경의 입문서로 활용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이리저리 떠돌고...핍박을 받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1536년 7월에 바젤에 있던 칼빈은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는 문제로 잠시 파리로 숨어들어갔다가 많은 개신교인들이 보호를 받고 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그곳에 정착하기를 소망하고 길을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칼 5세와 프랑스 왕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막혀 있었고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피해 남쪽에 있던 제네바를 통과해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딱 하룻밤을 묵고 떠나려했던 제네바에서 그의 삶을 ...할 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글이 『시편 주석』의 서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이제 조용히 은거하고자 스트라스부르로 가고자 했던 지름길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폐쇄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제네바에서 하룻밤 이상은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었다...그런데 지금은 비열하게 교황주의자로 전향해 버린 어떤 사람(뒤 띠에)이 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고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 열정에 불타고 있었던 파렐이 순간적으로 나를 머물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썼다...

제네바에 들어와 개혁 운동을 진행하고 있던 기욤 파렐은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도시가 되었던 베른의 도움으로 제네바에서도 교황권을 거부하고 미사를 금지시켰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조직이나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교회 개혁은 단순히 로마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뒤 띠에를 통해 『기독교강요』의 저자였던 존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을 접한 파렐은 칼빈이 머물고 있던 여관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제네바에 머물러 함께 일을 하자고 설득하였습니다. 처음 제안을 받은 칼빈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고 그럴 뜻도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사실 칼빈이 가진 기질이 본성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겁이 많아서 항상 조용하고 평온함을 추구해 왔던 사람입니다. 시편 서문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개인적으로 조용히 사는 것이 항상 나의 목표였는데, 나의 그런 자연적인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변화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사, 그런 곳에서 조용히 휴식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조명받는 곳으로 끌어내셨고, 대중들의 이목이 집중하는 무대 위에 밀어 넣으셨다. 사실 내가 프랑스를 떠나서 독일로 갔을 때, 내가 항상 가절히 바랐던 것처럼, 그 목표를 세우고 거기서 다른 사람들에게 두드러지지 않은 구석진 곳에서 살려고 했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가진 기질이나 성향으로 인해서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그곳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책을 집필하는 안연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설득하는 파렐에게 이러한 자신의 뜻을 알렸지만, 그런 칼빈에게 파렐은 다음과 같이 소리 질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너는 너의 학문으로 핑계 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저주하실 것이니, 이는 네가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오직 너 자신만을 위해서 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령 앞에 칼빈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욤 파렐의 이 말은 칼빈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제네바에 남아 개혁운동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파렐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제네바에서의 첫 번째 사역이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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