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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다

1. 종교개혁, 왜 일어났을까?

❚ 중세시대 교회는 어떤 곳이었을까?

중세시대는 ‘교회가 지배하는 세계’였습니다. 교회는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는데, 그 중심에는 교황이 있었습니다. 중세시대 교황의 권력은 때로 황제보다도 막강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가 사람들의 구원을 책임져 주는 유일한 기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말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는 사람들의 모든 영적인 필요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바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는커녕 자기 죄 값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9%의 사람들은 죽어서 ‘연옥’이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더 정확히는 지옥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의 남은 죄의 형벌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중세 사람들은 늘 연옥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법1: 성물숭배

그러나 부자로 태어나거나 돈이 많으면 살 길이 있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자신이 쌓지 못한 의를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성물(성인이 지니거나 사용했던 물건, 예. 예수님이 태어난 말구유의 볏짚)을 사서 그것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성물을 사게 했는데, 성물은 그 자체로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가지게 되면 엄청난 의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성물의 값은 어마어마하게 비쌌고, 중세시대에 성물은 교회의 재정과 마을의 경제를 책임지는 최고의 상품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을 죽여서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나 유골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법2: 면벌부

면벌부는 연옥에서 받아야 할 형벌을 면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원래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에게 주어졌던 것이지만, 나중에는 돈으로도 이것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황은 면벌부만 있으면 죽은 사람도 연옥에서의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당시 흑사병에 의한 죽음의 공포가 유럽을 뒤덮으면서, 면벌부는 더욱 잘 팔려 나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벌여 들였고, 그 돈으로 화려한 성당을 건축하거나 자신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 교회, 타락하다

이처럼 교회의 권세가 강해지자, 교회는 ‘돈과 정치, 그리고 권력’에 욕심을 내게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은 독신으로 사는 것이 공식적인 규칙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것을 공개적으로 어기고 있었습니다. 주교와 신부는 물론, 교황들 중 절반 이상이 첩을 통해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주고 추기경직, 주교직을 사서 사생아들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경건의 장이 되어야 할 수도원은 수녀들과 수도사들의 사치와 향락의 무대가 되었고, 성직자들을 위한 교육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물질적, 성적으로 타락하고 도저히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떨어질 대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 사람들, 깨어나다

교회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교황의 권위가 바닥을 치는 동안, 유럽에는 새로운 생각이 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문주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로마 성베드로 성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사람들은 옷을 벗고 있는데, 그 몸은 온통 근육질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생각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높아지게 되었고, 이제 그들도 교회의 말도 안 되는 모습들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사회, 변하다

사람들만 변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시 유럽은 이슬람과의 무역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기술과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이, 화약, 나침반과 같은 고급기술이 들어오면서, 농촌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점차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시의 발달은 유럽 사회에 전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기독교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자본주의’ 사상을 심게 됩니다.

중세시대는 교회라는 시스템 하나로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 점차 무너지게 되면서 더 이상 교회는 그 기능을 잃게 되었고, 사람들은 교회를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다

❚ 루터의 고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증오한다.”

루터는 자신의 죄를 가장 처절하게 실감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루터는 1483년, 독일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엄격한 부모님의 교육 아래, 원래 법률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1505년, 루터는 길을 가다 천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번개가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을 때, 루터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 광부들의 수호여성자에게 기도했습니다. “성 안나시여, 저를 구해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루터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헌신적으로 생활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의 모든 규칙(철야, 금식, 독서 등)들을 철저하게 준수했는데, 3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금식을 하고, 영하의 겨울 날씨에 담요도 없이 자기도 하는 등 나중에는 건강이 상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수도사로서, 루터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선행과 고행이야말로 루터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기에 충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의로워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지만, 항상 죄의 굴레에서 헤매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고행을 해도, 죄는 루터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루터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증오한다.”

❚ 루터의 깨달음: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루터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의로워지기 위해 노력해도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괴로워하던 루터는 당시 새로 창립된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면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515년, 루터는 바울의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다음과 같은 구절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니,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

루터는 이 구절을 두고 밤낮으로 묵상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란 어떤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고 벌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알게 된 ‘하나님의 의’란 “100%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었습니다. 이제 루터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 루터의 결단: “교회가 틀렸다.”

그 결과, 루터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교회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면벌부 판매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당시 면벌부 판매는 교황의 재정 수업을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던 방법이었는데, 교회의 설교가들은 이러한 면벌부가 마치 무슨 마술적 효력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였습니다: “헌금함 바닥에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갇혀 있던 영혼은 화살처럼 솟아오른다네.”

면별부 판매 속에는 죄에 대한 올바른 회개는 없었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보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롭게 깨달은 믿음을 기초로 해서, 교회의 면벌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517년 10월 31일 신학 논쟁을 목적으로 95개 신조문을 작성하여, 비텐베르트 성당 문에 걸어 붙였습니다. 특별히 면벌부와 관련하여, 루터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1. 면벌부는 결코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
2. 면벌부는 연옥에 적용될 수 없다.
3. 면벌부는 헌금하는 사람에게 거짓된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해롭다.

라틴어로 쓰인 그의 신조문은 원래 종교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의도와 달리,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거대한 운동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얼마 안 되어 독일의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루터를 ‘위험한 교리’를 유포하는 자로 로마에 고발하면서 그를 이단으로 몰아갔습니다.

❚ 루터의 개혁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에 대하여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유일한 기준이 교황들이나 종교회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자칫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는 글들을 써서 직접 독일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는데, 그 결과 독일 전체뿐만 아니라 국경 밖에서도 루터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2) 만인제사장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예배 때 행해지는 여러 가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사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 제도들을 비판하고, 예배의 의식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배 의식들 가운데 정당화될 수 없는 것들을 폐기하고,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성찬과 세례만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교황만이 거룩한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3) 그리스인의 선행

루터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외쳤지만,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루터는 그리스도로부터 얻게 된 자유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선행을 이루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선행이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3. 새로운 교회의 탄생

❚ 루터, 재판정에 서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루터를 정죄하고 그에게 60일 내에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교회는 루터는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파문하였습니다.

이제 이 문제는 황제였던 카를 5세에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Worms)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소환되었습니다. 루터는 황제를 비롯하여 독일의 영주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도 루터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오직 성경의 권위만이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결국 루터는 범법자로 선포되어, 법의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몇몇 영주와 공작의 도움 덕분에 루터는 체포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의 영주와 공작들, 그리고 선제후들이 루터를 지지하면서, 마을의 예배당에서는 성상들을 제거하고 미사를 폐지하는 등 루터의 개혁은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상징했던 주교직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예배 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라틴어로 된 예배의식도 바르게 고쳐서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예배의 중심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데 두었습니다. 한편, 독일 내 성직자들은 독신주의를 포기하고 수도사와 수녀들도 결혼하고 가정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루터 또한 1525년, 수녀 출신이었던 캐서린 폰 보라와 결혼하였습니다.

❚ 새로운 교회의 탄생

결과적으로 보름스 제국의회의 칙령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습니다. 1523년, 다시 제국의회가 소집되었을 때에는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파를 향한 융화정책이 결의되었습니다. 보름스 의회칙령은 철회되었고, 수많은 독일의 제후들이 자기들이 선택하는 종교를 공인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및 독일 남부 대부분의 영주들은 로마 가톨릭교를 채택했고, 다른 지방에서는 루터파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습니다.

1526년, 본격적으로 루터교회가 출발하게 되었고, 1529년에는 루터의 <소요리문답>, <대요리문답>이 작성되었습니다.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되었는데,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입장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이단 루터파의 뿌리를 뽑겠다면서 대응하였고, 1546년 루터의 죽음 이후에도 황제와 루터를 지지하는 영주들 간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1550년, 양측은 마침내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맺게 됩니다.

1. 각 영주들은 자기 영토 내의 종교를 결정한다. 2. 루터파 외의 다른 어떤 기독교 형태도 인정하지 않는다. 3. 루터파로 개종하는 가톨릭 사제들은 재산을 포기한다.

이러한 조처는 독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곧 루터파는 이제 제국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 ‘국교’로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영주들은 종교를 개인의 자유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주민들은 영주들을 따라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 루터의 종교개혁

루터가 교회 역사에 남긴 중요한 공헌은 종교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다음 중요한 질문들에 대하여, 루터는 새롭고 통찰력 있는 해답들을 제시하였습니다.

1.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오직 믿음
2. 종교적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오직 성경
3.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만인제사장)
4. 기독교인의 삶의 최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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