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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Lee Juman

220410 믿는 모든 자의 조상 아브라함

최종 수정일: 2022년 4월 16일

믿는 모든 자의 조상 아브라함

롬 4:1-12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납득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확실한 근거와 증거를 가지고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 앞선 로마서 3장에서 복음과 구원 도리의 핵심,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선언한 사도 바울은, 이제 로마서 4장에서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이를 예증하며 입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은 “그런즉(그러므로)”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는 로마서 4장이 앞선 3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로마서 3장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31절의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를 대표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이신칭의 교리를 대표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라는 이 복음 선언은 구약성경과 결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약성경 전체와 잘 어울리는 것이요 구약성경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로마서 4장 전체에서 아브라함을 하나의 거대한 예시(example)로 제시하면서 이신칭의 교리를 재확인시켜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1-4절)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의 첫 번째 증거로 창세기 15:6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롬 4:1). “육신으로”라는 말은 “육신을 따라서, 곧 (율법을) 행함으로”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을 따라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혈통적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자기의 육신(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이 없었고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그러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조차도 행함으로써는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었고 아무런 자랑도 할 수 없었다면, 우리 중 자기의 육체(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창세기 15:6을 인용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3절; 창 15:6 참조). 바울은 이어지는 로마서 4:9과 4:22-24에서도 창세기 15:6을 거듭 인용하였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 전체에서 논증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어떤 공로적 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우리의 믿음에 어떤 공로적 가치나 믿음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서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모든 근거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수단입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5-8절)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의 두 번째 증거로 시편 32:1-2을 제시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6-8절; 시 32:1-2 참조).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의 이 시편을 통해, 일한 것이 없이도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가 있음을 말씀하셨고, 바로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시편 32편이 이신칭의 교리를 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그 증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비록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허물의 사함”(1절), “죄의 가리움”(1절), “정죄를 당하지 않은 자”(2절), “내 죄의 악을 사하심”(5절) 등의 표현으로 주로 “죄 사함”만을 강조하였지만 죄 사함은 여전히 칭의의 한 부분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 이로써 바울은 다윗 역시 행함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칭의를 증거하였음을 잘 논증하였습니다.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9-12절)


바울이 이신칭의 교리의 증거로 제시하는 세 번째 증거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던 시점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를 시행하였는데,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과 17장 사이에는 14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할례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9절). 이것은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 매우 의미 있는 사실입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행위”를 한 마디로 상징하는 구약의 성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의 특권을 할례와 결부시키면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그러한 주장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자 복음 왜곡이었습니다.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허용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차별이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반문합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10절). 즉,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의 믿음이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면, 할례는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할례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가지게 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표시하고 인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11절). 즉 “할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징하고 인친 것”(존 머레이, 로마서 주석)입니다. 만일 할례가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믿음은 할례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표시하며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조상”이 될 뿐만 아니라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12절).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순전히 은혜로” 되는 것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4-5절). 또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일으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전히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진정한 행복자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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