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11-14
마태복음 26-27장은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뜰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물었던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고 말씀하신 것과, 총독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에 “네 말이 옳도다”(마 27:11)라고 하신 말씀을 하신 것 외에 계속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언에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거짓 고소에도 대답하지 않고 계속 침묵하셨습니다(마 27:12).
예수님은 왜 그토록 거짓된 고소와 곡해하는 말들에 대해서 아무런 반박도 하시지 않고 침묵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은 “말씀(로고스)”이라 불리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까지도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3-17장).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그토록 침묵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왜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리시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왜 그렇게 침묵하신 것입니까?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침묵하신 주님
첫째, 예수님의 침묵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예고된 침묵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침묵하실 것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잠잠하셨고(마 26:63),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마 27:12).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총독의 재판 자리에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지독한 침묵을 보고 심히 기이히 여길 정도였습니다(마 27:14). 사람들은 보통 법정에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 흔하지 않은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자기를 가리켜 기록된 구약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심으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된 그 메시아가 바로 자신이심을 큰 소리로 증거하는 중이셨습니다.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침묵하신 주님
둘째,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위한 침묵이었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시기 위한 구원자의 침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거하시고 많은 일들을 행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리실 때가 아니라,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실 때였습니다. 자신이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바로 그 어린 양,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을 보여주실 때였습니다. 그 때는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임을 당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시어(고후 5:21) 사형 선고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으시기 위해서는 불의한 재판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체포되셨고, 불의한 재판을 받아서 의인으로서 죄인 취급을 받으시고 사형을 선고 받으시기 위하여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신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죽지 못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시려면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서 아무런 변론을 하지 않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가장 깊고 완전한 사망과 무덤의 침묵으로 들어가신 주님
셋째, 예수님의 침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더 깊고 완전한 사망과 무덤의 침묵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일곱 마디 말씀이나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온 몸이 찢겨지고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으신 후에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우리의 구원과 복에 관한 그 달콤한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죽임 당하신 주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들어가셔서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지옥 고통을 당하시며 침묵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확실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의 침묵은 그의 죽음을 확인시키시는 침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침묵으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확실함을 온 세상에 큰 소리로 선포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의 침묵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금요일은 성금요일이라 하여 예수님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곤 합니다. 또한 부활절 주일이 되면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에 대해 모두 기뻐하며 예배하기 위하여 모입니다. 그러나 토요일은 사람들이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가장 깊이 침묵하셨던 토요일의 침묵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지옥 고통을 받으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완전히 침묵하셨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당하고 계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사망의 형벌을 받았음을 확신하게 하기 위하여 무덤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무덤의 침묵 역시 우리를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침묵을 깨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활로써 그의 모든 침묵을 깨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그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길을 가시면서, 근심하고 있던 그들에게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눅 24:27)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날 해가 기울어지기까지 계속될 정도였습니다(눅 24:29).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한 제자에게도 찾아가셔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24:36-44). 주님께서는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눅 24:46-47)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눅 24:48)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여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다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눅 24:49, 행 1:8).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우리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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