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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사도신경 해설(4)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의 네 번째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일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한 후에, 그분의 삶 전체를 ‘고난’으로 요약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이제 사도신경 4항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고난을 말할 때, 빌라도를 꼭 집어서 가리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건의 역사성을 확증해주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정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제네바요리문답 56문).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넘겨진 예수님을 재판해야 했습니다. 빌라도의 재판은 아주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놓아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법대로 판결하지 않고, 군중들의 압력에 굴복한 결과였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라는 죄인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유월절에 죄인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빌라도는 죄가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죄가 없는 의인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죽어 마땅한 죄인은 정죄를 받지 않고 풀려났습니다.

우리는 바라바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를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이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에 의해 정죄를 받으신 것은 하늘에 계신 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우리를 무죄로 선고하기 위한 것입니다(제네바요리문답 57문).


2. 그리스도의 고난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전 생애를 ‘고난’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만 고난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생애 전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사시며 가난 속에서 수고하셨고, 거절, 조롱, 배신을 당하기도 하셨고, 마지막에는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육신의 고난만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은 그분의 영혼에 받으신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버림 받으셨고, 진노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고난을 겪으신 주님께서 누구보다 우리의 고난을 잘 아십니다. 육체의 고통, 거절의 슬픔, 배신의 아픔, 누명으로 인한 억울함 등 우리의 고난을 주님께서 공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하십니다. 어떤 고난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9).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인줄 알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가장 잔인한 사형 도구이며, 유대인에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 십자가를 우리는 왜 사랑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는 사실 우리가 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찬란하게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이런 끔찍한 일 없이도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11문). 죄를 지어도 그냥 용서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불의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풀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 즉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던 존재 전체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롬 6:6), 우리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5:24)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더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은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이토록 무서운 죄입니다. 죄인이 가장 모르는 것이 자기 죄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모릅니다. 십자가를 볼 때 비로소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죄의 종노릇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려지는 우리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청년1부 사도신경 해설(제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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