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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ee Juman

칼뱅의 생애와 사상(1)

최종 수정일: 2022년 11월 5일

칼뱅의 생애와 사상(1) 1509-1534년까지


분위기

중세 유럽의 상황을 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람들의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 교회는 영적・도덕적 안내자로서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다수의 교구 성직자들은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형편 없었고, 고위 성직자들 역시 무능하고 탐욕스러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불신하게 되었고, 성직자들을 멸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의 권위가 추락했습니다. 한편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개인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인쇄업 등 기술의 발달하면서 특별히 교회의 갱신과 개혁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책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인문주의자들은 “근원으로”(ad fontes)라는 모토를 따라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에서 답을 찾고자 하였고, 종교개혁자들은 동일한 모토를 가지고 “성경”(원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어느날, 파리 근교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장 칼뱅이 태어납니다.


<칼뱅의 생가,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부모님

1509년 7월 10일, 칼뱅은 파리 근교의 누아용(Noyon)에서 지라르 코뱅(Girard Cauvi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칼뱅의 본명은 장 코뱅(Jean Cauvin)이었는데, 신학 공부를 위해 파리에 갔을 때 ‘요안니스 칼비누스’(Ioannis Calvinus)라는 라틴어 이름을 사용하게 되면서 프랑스어 이름도 장 칼뱅(Jean Calvin)이 됩니다. 영어로 발음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존 칼빈(John Calvin)이 됩니다. 칼뱅의 아버지는 교회법을 다루는 법률가였습니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친분을 맺기 좋은 직업이었지요. 덕분에 칼뱅은 어린 나이에 성직록을 받아 학비로 사용할 수 있었고, 귀족 자제들과 함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칼뱅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독실한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칼뱅이 불과 여섯 살이던 1515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칼뱅의 서명, 위키백과>



선생님

1523년, 칼뱅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로마 가톨릭 신학의 중심이었던 파리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파리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문주의자이면서, 루터파 신앙을 가진 르페브르(Jacques Lefevre d’Etaples)의 영향이 두드러졌습니다. 르페브르는 1521-1525년까지 파리 근교인 모(Meaux) 지역에 제자들을 모아 종교개혁 운동을 합니다. 이 그룹에는 칼뱅과 깊은 인연이 있는 ‘기욤 파렐’(Guillaume Farel)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칼뱅은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파리에서 마튀랭 코르디에(Mathuring Cordier) 선생님을 만나 라틴어를 배웁니다. 칼뱅은 코르디에 선생님을 깊이 존경하였고, 나중에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헌정하며, 이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칼뱅과 코르디에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훗날 코르디에는 제네바에서 칼뱅과 합류합니다. 코르디에는 칼뱅에게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셀더하위스).


<18세기 몽테귀 대학 안뜰, 위키백과>


이후 칼뱅은 명문 대학인 몽테귀에 입학하여 신학 예비 과정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마칠 무렵(1528년경), 갑자기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내용인즉, 신학 공부하지 말고 법학을 공부해서 법률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칼뱅은 시편 주석 서문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내가 아직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는 내 길을 신학 공부로 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이후에는 법조계에서 부유한 이들이 많이 나왔다고 생각하셔서, 그런 기대로 갑자기 아들의 진로를 바꾸셨다”(브루스 고든, 31-32).


<몽테귀 학교 시절 칼뱅,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당시 칼뱅의 아버지는 교회와 심각한 갈등이 있어서 수찬 정지까지 당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칼뱅이 계속해서 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성직자로 출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로 출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법학을 공부하게 하였던 것이지요. 칼뱅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법학 공부를 위해 오를레앙으로 떠납니다.


오를레앙에는 굉장히 탁월한 법학자들이 있었지만, 칼뱅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독일인 법학자 ‘멜히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였습니다. 그는 루터파 신앙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지요. 볼마르는베자의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칼뱅은 볼마르에게 신약성경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배웠고, 더불어 루터의 신학도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후에 칼뱅은 고린도후서 주석을 볼마르에게 헌정하며, 특별히 그에게 그리스어를 배운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친구

이 무렵 한 사람이 칼뱅을 찾아오는데요. 사촌 형이었던 올리베탕(Pierre-Robert Olivetan)입니다. 종교개혁 신앙에 투철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능력도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랑스 인문주의를 이끌었던 르페브르가 프랑스에도 모국어로 된 성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번역을 맡긴 사람이 젊은 올리베탕이었습니다. 나중에 올리베탕이 번역한 성경의 서문을 칼뱅이 씁니다. 그림을 보면 올리베탕과 칼뱅이 굳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요. 칼뱅에게 종교개혁 신앙을 전하며 설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자의 전기에 따르면 칼뱅은 올리베탕을 통해 “참된 종교로 권면을 받아 성경 읽기에 열중하고 미신을 혐오했으며, 그리하여 저 종교 의식들에거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올리베탕과 대화하는 칼뱅, 개혁주의학술원 홈페이지>


1531년 2월 칼뱅은 법학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해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칼뱅은 마치 인문학자로서 출사표를 던지듯 첫 저작으로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1532)을 집필하여 출판합니다. 후원자를 찾지 못해 결국 빚을 내서 자비로 출판하였는데요,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칼뱅이 첫 작품으로 관용론 주석을 쓴 것을 볼 때, 칼뱅이 원했던 직업은 사제나 법률가가 아닌 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비로소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 야심차게 시작했는데, 불행하게도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칼뱅이 몽테퀴에 있을 때 사귀게 된 친구 중에 니콜라 콥(Nicolas Cop)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무려 프랑수아 1세의 주치의였습니다. 굉장히 유력한 집안이었지요. 놀랍게도 콥의 가족 모두가 루터파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1533년 니콜라 콥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1월 1일 총장 수락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때 니콜라 콥의 연설문이 칼뱅의 전집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연설문 작성에 칼뱅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콥의 연설문에는 종교개혁 신앙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고, 이 일로 콥은 해외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출세가 보장된 삶을 한 번의 연설과 바꾼 것입니다. 그 모든 것보다 이 연설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칼뱅도 이 일로 수배를 받게 되고, 정원사로 변장하여 앙굴렘으로 도피합니다.


앙굴렘에서 칼뱅은 좋은 친구였던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뭅니다. 그곳에는 풍성한 장서를 갖춘 큰 서재가 있어서, 칼뱅은 여유와 평화 속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 몰두하였는데요, 기독교강요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1534년 4월 말, 칼뱅은 누아용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교회로부터 받아온 후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성직록은 다른 사람에게 넘깁니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스 전역이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534년 10월 17일, 미사의 이단성을 비판하는 벽보가 파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동시에 게시됩니다. 문제는 이 벽보가 프랑수아 1세의 침실 문앞에도 붙여졌다는 것이지요. 이 사건 이후 프랑수아 1세는 종교개혁 사상을 가진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 일로 칼뱅은 프랑스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 바젤은 니콜라 콥을 비롯하여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많은 이들의 피난처이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칼뱅도 뒤 틸레와 함께 바젤로 향하고,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1535년 1월 바젤에 도착합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벽보 사본>


회심

칼뱅이 언제 어떻게 회심하였는지에 대해서 오늘날까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칼뱅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예외적으로 시편 주석(1557) 서문에서 자신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 목동인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신 것처럼, 비천한 자신을 부르셔서 복음의 사역자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신학과 법률을 공부하는 일에 무척 애썼는데,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신비로운 인도로 자신의 인생 행로를 다른 방향으로 바꾸셨다고 말하지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처음에 나는 너무도 고질적으로 교황주의의 미신에 열성적이어서 그 진흙의 깊은 수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회심으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셨고 온순한 성격이 되게 하셨다. … 이렇게 해서 참 경건에 대한 어떤 맛과 지식을 얻은 후로 나는 이내 그 속에서 정진하고자 하는 강렬한 갈망으로 불붙게 되었는데, 비록 내가 한꺼번에 다른 공부들을 그만두지는 않았을지라도 전보다는 훨씬 적은 열정으로 그것들을 추구하였던 것이다”(칼빈주석7, 160-161).


여기서 ‘갑작스러운(suddenly) 회심’이라고 번역된 표현은 ‘기대하지 못한’(unexpected) 회심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가 더 적합해 보이는데요. 칼뱅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제나 법관이 되고자 했고, 자신은 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지 못했던 신비한 섭리로 칼뱅의 인생 행로를 바꾸셨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는 아들의 출세를 기대하며 파리로 보냈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역자로 칼뱅을 인도하셨던것입니다.


칼뱅의 초기 생애(1509-1534년)에서 우리는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칼뱅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의 인생 행로를 인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세속적인 기대와 요구, 칼뱅 자신의 야심찬 시도와 실패 그리고 많은 인연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칼뱅을 복음의 사역자, 종교개혁자로 이끄셨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참된 신앙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신비로운 섭리의 손길 안에 있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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